나문희처럼 살아라
2012년 6월 25일에 썼던 글. 마지막 문단의 리듬감이 나쁘지 않군….
나문희처럼 살진 못한다. 여전히.
* * *
'우리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 희경씨!'
나문희의 이 말과 똑같은 뜻을 담아 참으로 와닿던 경구를 어디선가 봤었는데, 갈무리해두질 않아서 영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 이제 생각났다. 중국 작가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에서 본 친구에 대한 문장이었다. 검색엔진 덕에 바로 찾을 수 있다.
우정은 반드시 잔을 부딪칠 필요가 없다.
우정은 반드시 의가 좋을 필요가 없다.
우정이란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 보는지에 따라, 만나면 얼마나 즐거운지에 따라, 또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힘겨운지 털어놓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위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우정의 깊이를 저울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천박한 우정에 대한 이해인가.
황인숙의 인기있는 시 <강>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긴 하겠다. 그러나 <강>은 실존적 주체의 외로움을 좀 더 추상화시켜 노래하는 반면, 나문희와 왕멍의 이 말들은 끝내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할 우리들의 일상을 차분히 되돌아보게끔 만든다. 내 생활의 쳇바퀴 위에도 차갑지만 상쾌한 얼음을 문질러주는 느낌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생활인' 나문희의 모습을 얼마전 해피투게더3 <엄마특집>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예능이란 컨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뚝뚝함이랄까, 달변도 아니고 유머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난 이 분위기가 썩 익숙하거나 편안하진 않지만, 분위기를 깨진 않고 적당히 맞추긴 하겠다….'라는 양반집 마님 같은 은근하고 도도한 풍모가 느껴졌다.
일단 '주변 분위기'에 자신을 맞추는 게 철칙인 예능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요새 예능 출연자들에게선 거의 찾을 수 없는 '컨셉'이기도 하다. 더욱이 자신의 감정상태에 대해 주변에서 보내주는 즉각적인 반응과 호오(好惡)에 익숙한 요즈음의 예민한 감수성과도 영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그녀의 고모할머니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선구적 여성운동가 나혜석이란 것도 이때 알았다. 유재석은 그녀의 집안이 수원에서 '나 부잣집'으로 유명하다고 농을 건넸다. 찾아보니 나혜석의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지냈고, 나혜석의 가까운 오빠들도 모두 일제시대 때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수원의 명문가였던 셈이다.
이런 영향 탓일까. 나문희는 여전히 아흔이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신의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다고도 했다. 자신의 생활과 배경에선 '마님' 냄새를 풀풀 풍기는 나문희가 노희경에게는 대중목욕탕을 자주 찾으라고 하고, 야채 파는 할머니가 예쁘다고 말했다는 점이 재밌다. 그렇듯 소박하고 '찐한' 연기로 매번 풀뿌리 같은 촌부들을 그려내는 것도 말이다.
물론 자신이 관계맺은 타인(그것이 가족이든 친지든 친구든 동료든 간에)을 소홀히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기착취'를 만성적으로 일삼는 시대에, 나문희의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란 말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삶의 애환을 깊이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존재보다 더 불행한 이가 또 있으랴? '피로사회', '자기착취'란 말을 유행시키고 있는 재독 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자유라는 말의 독일어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 뜻은 ‘친구와 같이 있다’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주위에 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둘 것. 그것은 우리에게 남과 함께하는 삶의 풍요와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줄지니.
그러나 이 기막히게 불친절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친구가 해결해줄 수 없고, 친구에게 의존할 수 없고, 친구와 나누어 짊어질 수 없는 짐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게 오히려 '자신으로부터의 회피'의 다른 얼굴이 되기도 쉽단 것을 인정하기. 지나치게 잦고, 빠르게 잔을 부딪치는 일은 때론 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의 기갈을 채우는 행위라는 걸 깨닫기.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이 삶에서 만났을지라도, 평생을 오래 두고 그 관계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울 것. 다른 누군가의 삶이 눅진하게 배어든 주름의 '예쁨'을 발견할 능력을 갖출 것. '친하다'라는 단어와 '우정'이란 개념의 본래적 존엄을 복원할 것. 그러니깐, 나문희처럼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