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LUMBER

셰익스피어 작, 데클란 도넬란 연출 <템페스트>

Alyosha 2013. 10. 3. 02:30









바로 이런 작품을 물경 10만원을 내며 보기 위해서, 나는 직장생활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월급날만을 기다리면서 천원 이천원이라도 아껴보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연이 끝난 직후 내가 옆지기에게 꺼냈던 말은 다음과 같다. "고작 몇 만원을 아끼려고 이 작품을 R석에서 보지 않았던 건 비극이었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연극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 즉 연극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배우에 있다는 신념이 있었고, 단순한 동시에 입체적이고 풍성한 스테이지가 있었다. 그 위에서 연주되는 소박한 악기들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었고, 브레히트와 피터 브룩으로 이어지는 총체극적 전통이 있었고, 러시아 배우들의 유연하고 활달한 신체와 정신이 있었다. 고전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일탈과 유머가 있었다. 



<템페스트>는 자연법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이며, 인간을 둘러싼 자연은 보이진 않지만 순선하고 정의로운 원리로 움직인다. 반면 리어왕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력을 우습게 여긴 이상주의적 인물의 몰락도 나온다. 다분히 현실적인 인식이다. 그런가 하면 프로페로스의 마술적인 능력이나 정령과 괴물의 등장 같은 환타지적인 색깔도 짙다. 환타지를 그리면서도, 프로페로스와 대립하며 자유를 갈구하는 피억압자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템페스트>에는 이처럼 모순이 가득하고, 그 모순들이 역동적인 서사 위에서 신명나는 에너지로 부딪친다. 내가 이렇게 뜬금포로 셰익스피어를 예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위대한 고전 희곡이 재미없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게 바로 연출의 승리였고, 결국 셰익스피어의 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극장이 내걸었던 '영국 최고의 셰익스피어 연출가'라는 타이틀은 뻔한 마케팅용 문구라고 생각했는데, 데클란 도넬란은 레알이었다. 그는 <템페스트>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고, 관객들의 타이밍을 빼앗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사도 유머도 미장센도 무엇 하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역시나 그는 배우들의 앙상블이야말로 연극의 핵심이며, 일평생 한 극단에서 연기하는 러시아 배우들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굉장한 감독이었다!



어떤 분야든지 최고를 보면 보는 눈이 달라진다. 늘 최고의 것을 보아라. 괴테의 말이었다. 적어도 오늘 나는 최고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다. 내가 꿈꾸었던 연극적 이상이 '바로 저기서' 펼쳐지고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에서 날아온 극단이 2시간 동안 무대를 폭풍처럼 휘저은 후 한국에서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러니깐, 우리는 돈을 잘 벌어야 하는 것이다. R석은 내내 아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