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함민복의 결혼
2011년 6월 17일에 전 블로그에 적었던 글. 어느덧 3년이 흘렀고, 역시나 갈무리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훈은 김훈이다. 내가 함민복과 김훈처럼 쓰고, 살 순 없겠지만…. 아니, 그들처럼 왜 살 수 없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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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친구 J군과 대화하다가, '함민복 결혼' 얘기가 나왔다. 내가 꺼낸 것이었는데, 지난 봄 어딘가에서 지나치듯 들은 걸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도 결혼 덕택에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았다던' 시인의 에피소드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고, J군은 스마트폰에 슥삭슥삭 메무를 해 두었다. 오늘 낮엔 함민복 결혼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2011년 3월 6일의 일이었고, 나이 쉰의 동갑내기 女제자와 화촉을 밝혔단다. 어느 분의 말마따나 동아일보의 기사(http://bit.ly/kIEoFH)가 가장 좋았다. 절로 미소가 머금어질 수밖에 없는 기사였다. 제목은 "‘강화도 노총각’ 함민복 시인, 쉰살 동갑내기 제자 박영숙 씨와 결혼하던 날"이었다. 주례를 맡은 김훈과 그의 아내의 에피소드는 언제나 '나도 저런 아내와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게 한다. 소담하고 유머러스한 '구박'을 서로 나눌 수 있는 부부 사이 말이다.
‘…/살림을 차린다는 것은,/새싹 신랑신부의/영원한 소꿉놀이입니다./사랑사랑, 배냇짓 춤입니다./화촉을 밝히는 순간,/태초가 열립니다. 거룩한/우주의 놀이가 탄생합니다’ (이정록 시인의 축시 '우주의 놀이')
중앙일보의 기사는 좀 더 세세한 느낌이었다. 물론 잘 읽었다. (http://bit.ly/eWTq6t) “오늘 결혼하는 함민복 시인은 고통, 고생, 가난, 외로움 속에서도 반짝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시로써 표현해 온 시인입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잘 모른다는 거지요.” 이건 김훈의 말이었다. 그리고 노총각 함민복이 시의 세계를 떠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었는데, 읽고선 웃기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토록 문단의 관심이 뜨거웠던 것은 함씨의 됨됨이, 생활 방식, 시 세계 등으로 미뤄 그가 가정을 이루고 윤기 있는 삶을 영위하리라는 데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강화도로 훌쩍 건너간 함씨는 누구보다 어렵게, 그러나 끈질기게 시 쓰기에 매달려왔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한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을 떼어 내 출판사로 보내 받은 몇 만 원으로 버텼다는 등 타협을 거부하고 오롯이 시에 매진한 그의 일화는 끝이 없다. 이날 축하는 그런 시 정신에 대한 축하에 다름 아니다." (중앙일보 기사 中)
요새는 시를 거의 읽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건 대학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대학에서 시집이라도 들추고 이름을 알던 시인 중 한 명이었던 함민복의 결혼을 뒤늦게 축하한다. (이육사문학관에서는 '문단의 쾌거'란 이름의 화환을 보냈다고.ㅋㅋ) 조선일보에선 신혼의 이야기(http://bit.ly/gZz1H7)도 들추었는데, 함민복 시인의 어머니가 2009년 1월 1일 별세하셨구나. <눈물은 왜 짠가>라는 명작에 등장하는 바로 그 어머니.
어쨌거나 이 결혼 소식은 뒤늦게나마 내 블로그에 꼭 올려두고 싶었다. 그의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기원하고, 내 언어가 좀 더 맑고 가난해지기를 기원한다. 물론, 내 삶도 역시 그러하기를.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