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지 않은 '조한혜정 쌤 에둘러 비판'
일단 이 포스팅을 올리려면 조한혜정 쌤의 지난주(6월 13일자) 칼럼 <고립과 부유함을 벗어나 농활과 빈활을 떠날 때>을 옮겨두어야겠다. 조한 쌤이 재미있게 잘 쓰신 글인 만큼 술술 읽힌다.
[조한혜정 칼럼] 고립과 부유함을 벗어나 농활과 빈활을 떠날 때
기성세대에게 “양보하라”지만
경험이 부재한 청년들에게
누가 무엇을 양보할 수 있을까
지난달 1학년 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작년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평소보다 못 봐서 가려던 대학에 못 갔는데 다시 시도해야 할지 고민중이라 했다. 연세대냐 서울대냐는 꼭 실력 차 때문이라기보다는 운도 많이 작용하고 예전에 입시공부에만 집중했던 시간이 그립기도 한데, 그간 대학에서 한 학기를 날려버린 느낌이어서 대학 입시에 다시 도전해 삶을 ‘리셋’(재시작)해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반수’라고 불리는 이 문제를 놓고 수업에서 함께 토론을 했는데 많은 학생들은 리셋을 하고 싶다는 그의 욕망에 공감을 드러냈다. 리셋도 중독이 될 수 있다고 염려를 하면서 말이다.
5월 노동절 집회에 참여해서 관찰 글을 써오라는 숙제도 냈었다. 30대 인디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였다. 문화인류학 수업은 사회현상을 폭넓게 보는 능력을 키우고, 특히 개인과 구조의 연결고리를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목적이 있는지라 많은 것을 느끼고 오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시위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 시위에 가지 않은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참여는 했는데 시위로 인해 차가 밀린 것 때문에 내내 불편했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실은 소규모 인파가 행진을 했던 터라 차가 밀린 것도 아니었다.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극진한 배려’ 세대가 등장한 것인가?
이들은 꽤 풍요로운 사회에서 나름의 배려와 존중을 받고 자란 편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 존중받기를 원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들이 원하는 존중은 모욕을 받지 않는 것,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것이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차원의 존중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와 공공에 대한 감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존중과 배려는 의도와는 달리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고립시킨다.
학기말 조별 발표 또한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첫 팀의 주제는 “왜 우리 조모임이 망하게 되었는가?”였다. 처음에 국산 제품만 먹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국산 제품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했고, 다음엔 교내 수위 아저씨나 청소 아주머니들께 인사하는 프로젝트를 해보려 했는데 중간발표 때 반대가 있어서 포기했고, 지난 학기 선배들이 했던 독립영화 보기를 해볼까 하다가 너무 쉬운 것 같아서 포기하다 보니 한 학기가 다 가버렸다고 했다. 자신들이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을 설득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리더가 없는 조모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등의 변이 이어졌다. 아마도 이들은 조모임이 실패한 백가지 이유를 금방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존중과 배려에 대한 감정적 고픔’과 하지 말아야 할 수백가지 이유를 단숨에 생각해낼 수 있는 ‘똑똑함’이 만나면 고립과 부유하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교육부와 학교와 가족에게 보상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할 시간을 유예시킨 것에 대한 보상 말이다.
입시 교육으로 인해 극심한 불균형 성장을 해온 대한민국 청년 모두에게 스무살이 되면 1년간 공익근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어떨까 한다. 각자 살고 싶은 지역에 가서 아이를 돌봐주고 노인에게 책을 읽어드리거나 집을 고쳐드리면서 사회와 만나고 공공의 감각을 키우는 경험을 깊고 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청년 당사자 운동을 해온 김영경 서울시 청년 명예 부시장은 기성세대의 자원 독점을 비판하면서 청년들에게 “양보하라”고 말하고 있다. 맞는 주장이다. 그런데 경험이 부재한 청년들에게 누가 무엇을 얼마나 양보할 수 있을까?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청년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모일 수 있을까?
소심한 배려 때문에 더더욱 움직일 것 같지 않은 학생들에게 이번 방학에는 꼭 ‘농활’이나 ‘빈활’ 떠나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자체적으로 기획해서 말이다. 변화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의 두려움 없이 일에 몰두해보기, 생각을 나누고 조율해가며 마침내 ‘멘붕’에서 서로를 구해줄 친구 얻기, 신뢰할 사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 일요일 밤, 느즈막히 이 글을 읽고 갑자기 필 받아서 이에 관한 '비판적 제언'(-_-)을 원고지 10매에 꽉꽉 채워 한겨레 <왜냐면>에 기고했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실어주진 않았다. 이번 화요일 <왜냐면>에는 국회의원 한 명과 교수 세 명의 원고가 차곡히 실려 있었고, 정성을 팍팍 들여 처음으로 <왜냐면>에 글을 보냈던 난 잠시 강렬한 질투심과 아쉬움을 느꼈다. 지난주 칼럼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다음에 묵혀둔 뒤 실릴 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날 늦은 밤 잠깐 함께 글을 봐준 친구의 표정으로 봐서는, 잘 쓰진 못했더라도 그나마 평타는 친 글이라는 믿음으로, 여기에 올려본다. 이 글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조한 쌤의 <글읽기와 삶읽기>도 펼쳐보고 그랬다. <글읽기와 삶읽기> 1권 185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거창하고 화려하고 세련된 무수한 ‘겉도는’ 말에 유혹당하지 않도록 서로를 도와주면서 우리의 삶을 토론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자. 우리 삶 한가운데서 나오는 지식, 자신의 내면에서 삭혀져 나오는 글을 쓰자. 힘을 빼기보다 힘을 솟게하는 글, 만병통치약을 바라는 조급함 속에서 쓴 글이 아니라 ‘우리’를 만들어 가는 여유와 즐거움 속에 쓴 글, 생각을 풀어주고 마음을 풀어주는 그런 글을 말이다."
말이야 비판적 제언이지 조한 쌤 정도로 '청년세대'를 위해 왕성하게 실천하고 글 쓰고 연구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교수가 또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조한 쌤이 변함없이 제시하고 있는 '페다고지'(서로 평등한 관계 속에서 질문하고 대답하며 함께 배워가는 대안적 교육법)식의 태도를 믿지 못하겠다. 너희가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난 단지 옆에서 자극하고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뿐이다, 는 '이상적인' 방법론을 완전히 신뢰하진 못하겠다는 것이다. 페다고지의 이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페다고지의 실천이 곧 절대선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진리였다면, 프레이리의 먼지낀 책을 감명깊게 읽었던 386들은 벌써 아름다운 교육현장과 한국사회를 만들었겠지 아마.
청년들의 ‘사회적 불균형’, 친절한 조언만으로 해결되진 않아
― 조한혜정 교수의 6월 13일 칼럼에 대한 제언
지난 6월 13일자에 실린 조한혜정 교수의 칼럼 <고립과 부유함을 벗어나 농활과 빈활을 떠날 때>를 읽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입장에서 조한 교수의 칼럼은 매우 신선했다. 왜 그런가. 일단 그녀는 청년들을 고달픈 현실에서 좌절하는 균질적 집단의 ‘약자’ 또는 ‘피해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자양강장제 광고 같은 ‘청춘론’이 여전히 강성한 분위기에서 이만 해도 어딘가. 그녀가 바라보는 많은 학생들은 사회성과 공공성을 갖추지 못한 채 자발적인 ‘고립’을 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조한 교수는 그들이 더욱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와 만날 것을 주문한다. 예컨대, 농활과 빈활을 통해서 말이다.
필자는 조한 교수가 묘사했던 학생들의 부정적 모습이 우리 사회의 20대를 정직하게 바라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녀가 오래 전부터 죽 그래왔듯, 젊은이들과 끊임없이 부대끼면서도, 그들을 섬세하게 관찰한 덕택이리라. 조한 교수가 분석한 대상이 한국사회에서 손꼽히는 일류대생이란 걸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연세대에 다니지 않는 이들은 그보다 더욱 심한 ‘고립’과 ‘부유’를 겪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동시에 조한 교수가 나름으로 제시한 해결책은 그녀의 분석이 타당한 만큼 더욱 공허하게 느껴지던 게 사실이다. 어쩌면 청년들 자신이 사회적 존재가 되지 못한 점에 대해 ‘누군가’(조한 교수는 교육부와 학교와 가족을 지칭했다)에게 ‘보상’을 요구하라는 발상 자체도 지극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먼저 조한혜정 교수는 청년들이 “실패의 두려움 없이…신뢰할 사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경험”의 긍정성을 과장했다. 어떻게 표현한다면, 그런 경험을 매끈하게 ‘이상화’했다. 필자는 새내기 시절부터 농활과 빈활을 나갔고 선후배들과 4년 내내 자발적인 책읽기 공동체를 꾸렸다. 극회에선 연극에 몰두하며, 졸업한 후 대학로에 몸을 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물론 필자에게 좋은 친구들을 비롯한 귀중한 자산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필자는 후배들에게 이런 경험이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해줄 자신이 없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공동체 활동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체적인 기획’ 자체가 곧 학생들의 공적 사회성을 담보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더구나 “입시 교육으로 인해 극심한 불균형 성장을 해온 대한민국 청년 모두에게 스무살이 되면 1년간 공익근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어떨까 한다”는 조한 교수의 대안은, 그것을 아무리 비유적으로 읽는다손 치더라도, 마치 뜬구름을 잡는 듯 허무하다. 그러나 조한 교수의 이런 ‘이상적인 너무나 이상적인’ 대안은 역설적으로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학생들에게 농활이나 빈활을 (자체적으로) 떠나볼 것을 권하는 조한 교수조차도, 기성세대에 의해 적절하게 부과된 (준)강제적 제도의 필요성을 은연중에 피력하고 있다는 진실 말이다. 필자는 청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권유하는 데서 그치는 조한 교수에게선 어떤 ‘무책임한 애정’을 느낀다. 실현되기 힘들 걸 알면서 던지는 친절한 조언처럼 말이다. 반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불균형을 과감히 ‘교정’할 것을 제안하는 그녀의 진단에선 솔직하고 책임감 있는 강단을 느낀다.
정리하자. 필자는 조한혜정 교수가 ‘학생들은 공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존재’라고 지적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청년들의 ‘유예된 사회화’를 바로잡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그녀의 주장에는 진정성이 배어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사회화가 스무살 청년들에게 벼락과외 시키듯 ‘1년 공익근무’를 하게 하는 식으로 해결될 리는 만무하다. 이것이 필자가 대학 새내기들보단 오히려 초중고교 ‧ 대학교의 선생님들과 교육 당국자, 학부모들이 “자체적으로 기획해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젊은이들에겐 공적 경험이 없다. 서로 협력할 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고 키워낸 어른들은 어떤가? 조한혜정 교수뿐만 아니라 모든 학교 구성원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슬프고 기막힌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