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行 (2014. 2. 26~27.)
회사에 27~28일 휴가를 내고, 26일 밤 1박 3일 코스로 준비한 후 지리산에 다녀왔다. 그러나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화대종주 구간은 봄철 산행통제기간에 막혀(나는 왜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에서 장터목대피소를 예약할 때 이를 보지 못했단 말이냐?) 결국 무박 13시간 정도의 코스로 지리산 서쪽 산세를 훑다.
성삼재분소에서 출발하여 고리봉, 만복대를 타는 산길도 통제구간이어서, 성삼재부터 남원으로 가는 초입인 고기리삼거리까지는 861번국도와 737번국도를 이용했다. 고로 이번 지리산행은 등산이라기보단 트래킹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27일 새벽 2시 정도부터 같은 날 오후 5시 즈음까지 대략 40km를 좀 넘게 걸었다.
회사에서 바로 터미널로 이동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일정도 있고 준비도 다 마치지 못해 집에 들렀다가 배낭을 들춰매고, 등산복으로 환복한 뒤 남부터미널로 이동했다. 남부터미널 저녁 10시 심야버스로 구례행. (역시나 어리버리대는 성정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26일 밤 10시 버스가 아닌 27일 밤 버스를 예약했던 것이었다. 그리고선 뻔뻔스럽게 제 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에게 내 자리라고 우기다가 아주머니도 속고 나도 속고, 앉아있다가 결국 내가 퍼뜩 달력을 보고 표를 교체했다. 다행히 시간 변경은 가능했다.)
새벽 1시 즈음 도착하여 처음 장만한 장비들을 체크하고, 주전부리도 좀 산 뒤 2시경 구례버스터미널에서 화엄사까지 7km 남짓 걷다. 보통 지리산을 탈 때 이 길은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하고, 나도 재작년 2월 종주할 때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뭐 그냥 걸어봤다. 대략 1시간 40~50분 정도 걸리지 않았던가 싶다. 배낭이 좀 무거웠고, 짐을 요령 있게 챙기지 못하여 왼쪽 어깨가 결렸다. 표지판으로 확인한 것이었지만, 지리산의 그쪽(구례-하동) 근처에도 온천지구가 있고, 한옥마을이 있더군. 전자는 부모와 함께, 후자는 연인과 함께 한번쯤 와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화엄사로 향하는 5km 정도의 차도는 쭈욱 뻗은 일차선 도로인데, 그 차도 입구에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란 국뽕스러운 편액을 달고 있는 으리으리한 대문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참 영지치고는 멋도 없고 뭔가 켜켜한 세월의 느낌도 담겨있지 않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내가 여느 지방 관광지나 시골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므로 일단 패쓰. 먼 옛날 수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 하고, 또 고만고만한 민초들이 새벽길 부처를 뵈러 아옹다옹 발걸음을 옮겼을 그 천년고찰의 앞에, 모텔과 각종 산해진미에 보양식을 파는 음식점들만이 수두룩한 이유도 굳이 따져물을 필요가 없으므로 또한 패쓰. 다만 질서와 계통 없이 세워진 건물들, 성의 없고 부박한 간판들 따위가 멋이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새벽 3시경부터 일어나서 축사의 불을 킨 채 일을 하고 있던 어느 어르신을 보고선 마음이 좀 풀렸다. (지리산'스위스'관광호텔. 이름이 재밌어서 기억난다. 민족의 영산은 아무튼 20세기에 그 영기를 많이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
2년만에 만난 화엄사 불이문. 마침 새벽 3시 50분경이었는데, 경내에 들어서보니 새벽예불이 끝났는지 스님이 치는 법고 앞에 템플스테이 참여자 열댓 명이 모여 합장하고 있었다. 먹색 옷을 입은 젊은 남녀들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대웅전에 들러 비로자나불에 삼배를 하고 나오니 두터운 범종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총총 절을 빠져나왔다.
방문교를 새벽 4시 20분경에 지났었나?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는 이제 화엄사 계곡을 따라 무넹기를 거쳐 노고단까지 이동하는 6km 정도의 산길이었는데, 정말이지 대박+대박 힘들어서 평생 잊히질 않을 것 같다. 전날 부족했던 잠 + 회사의 쩔었던 업무 + 규칙적인 운동을 1~2달간 전혀 하지 않았던 탓의 체력부족 + 마지막 등산이 3개월 전이었던 탓의 실력부족 + 최근 늘어난 술담배 (+ 그리고 어쩌면 미세먼지?) 등등의 이유로 가파른 경사에선 진짜 10분 가다가 한 번 쉬고를 반복했다. 10분 가다가 한 번 쉬고, 30분 가다가 쓰러져서 한 10분씩 잠들었다가 다시 가고…. 그렇게 5시간이 넘게 몸을 질질 끌고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했다. 이제는 두 번째라 조금 익숙해진 풍경.
식당에서 컵라면을 끓여먹으며, 대구에서 노고단에까지 올라와 며칠 대피소에서 쉬며 하모니카 연습이나 할 거라는 어느 보헤미안 아주머니께 입산 금지 소식을 듣다. 그 말에 맥이 풀려 1시간이 넘게 내려갈 길이나 찾아보고 그랬다. 남원에는 대학교 2학년 때 독서실 방을 잡고 한 보름 묵으면서 책만 드립다 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 추억도 되짚어볼 겸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다. 그러나 나중에 내려가선 그 장소를 찾아보진 못했다. 남원-서울행 막차가 끊겨 결국 전주까지 가서 서울로 올라가야 했던 것. (그리고 인간적으로 배낭도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성삼재분소로 향했다. 위의 사진을 찍을 때 나는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을 듣고 있었고, 마치 나오던 노래구절이 "하얀 눈이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바로 그 구절이었다. 이 노래는 김민기의 곡들 중에선 물론, 한국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지리산을 걸으며 듣는 김민기가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웠다는 사실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마 대한민국의 어떤 산천에서 듣더라도 다름없을 것이다. 성삼재부터 고기리까지 넘어오며 김민기 1~4집을 고맙고 또 고맙게 들었다. 그가 없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할지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내리막길을 쭉쭉 걷다보니 오후 2시경이었을까, 남원과 구례가 만나는 달궁삼거리에 도착했다. 새벽에 하도 고생해서인지, 그리고 원래 등산은 한 번 탄력을 받는 게 중요하기도 해서, 체력적으로 힘든 건 별로 없었다. 여기서부터 고기리삼거리까지 12km는 차량 통제구간이어서 나 홀로 이동했다. 다시 정령치까지 쭈욱 오르막을.
정령치휴게소는 해발 1,170m에 자리해있는데, 강원 정선 함백산의 해발 1,330m 가량에 위치한 휴게소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휴게소라고 한다. 눈길을 뚫고 계속 올라갔는데, 도착해서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려 했더니 웬걸, 당연히 차량통제 기간이니 문도 열지 않았고, 산마루의 엄청난 칼바람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정령치휴게소에오르면 "동으로는 바래봉과 뱀사골 계곡이, 서쪽으로는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등과 남원의 시가지가 한 눈에 펼쳐진다"고 했는데, 이날 시야는 비바람에 전방 50미터도 채 되지 않는 듯했다.
고기리와 정령치를 잇는 737번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이 길을 얼마나 이용할까, 이건 그냥 지자체의 전시행정에 가까운 국도가 아니었을까, 남원에서 구례는 이렇게 산을 뚫지 않고 산의 둘레를 돌아가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찾아보니 이 길을 비롯한 지리산 횡단도로를 연간 110만 명이나 이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성수기가 되면 이 휴게소에 관광버스가 들끓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산을 좀 더 편하고 빠르게 즐기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내가 제대로 몰랐던가 싶었다. 지리산 아래에서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에 이르는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정책이 과연 무산될 수 있을까. 내가 걸었던 그 도로도 남원과 구례, 함양 등 인접 시, 군이 관광개발을 위해 1988년 즈음에 연결했던 길이라고 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고기리삼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남원으로 나가는 6시 10분행 버스를 탔다. 이날 비를 꽤 맞았는데, 그래서 다음날에는 감기로 좀 고생했다. 삼거리에서 남원 방향으로 10분 가량 걷다보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아래는 버스 시간표도 찍어두었다. 내가 도움을 받았듯, 누군가에겐 이런 글과 사진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여기서 버스를 타면 남원시내로 직행하는 건 아니고, 주위의 마을들에 일일이 들른 뒤 약 1시간 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버스값은 3,100원.
2012년 2월 지리산 첫 화대종주 때 결국 변변한 짧은 글 하나 남기지 못했던 게 무척 후회되어 이렇게 정리하는 글을 써보았다. 지난 번도, 이번도 딱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즐겁고 뻐근한 지리산행이었다. 산은 늘 나를 부르고 있다.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김민기의 곡 '봉우리'의 가사처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 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어쨌거나 자주 가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