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는 詩를 싣고
'택시는 詩를 싣고'를 시작하며
Alyosha
2011. 10. 18. 13:00
조우드가 자신의 웃옷을 쳐다보니 땅거북은 옷을 헤치고 나와 처음에 조우드가 그것을 잡았던 길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것을 지켜보더니 벌떡 일어서서 땅거북을 집어다가 웃옷에 다시 쌌다.
"꼬마들한테 갖다 줄 선물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가져가야지." 그는 중얼거렸다.
"그것 참 묘한 일인데?" 선교사가 말했다. "자네가 여기 오기 바로 전에 나는 자네 아버님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한번 찾아가 뵐까 하고 말이야. 그 영감은 하느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지요. 내가 집을 나온 지가 4년이나 되었으니까."
"편지도 안 하시나?"
조우드는 난처했다. "아버지는 편지 같은 걸 하는 양반이 아녜요. 그저 인사치레나 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일은 절대로 없지요. 당신 이름을 사인할 때 보면 누구보다도 멋지게 하시면서 말이죠. 연필에 침을 칠해가면서. 하지만 여태까지 편지 한 장 띄우지 않으시더군요. 그러면서 늘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일부러 연필까지 들고 끄적거릴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시거든요."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에서
'글'에 대하여 회의적인 때가 있었다. 언어를 주물럭거리는 일을 멀찌감치 경계했고 피했다. 채식주의자가 고기 먹는 이를 바라보듯, 나도 세상의 '글장난'들을 실눈을 뜨고 바라봤다. '生의 뜨겁고 붉은 비밀'은 글자에 담겨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난 행간을 살고 싶었고, 문자의 엄살을 박살내는 '몸'의 윤리를 실천하고 싶었다.
톰 조우드의 아버지는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선 강인한 인간의 상징이다. 톰의 아버지는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일 필요가 없는 인간이며, 자신의 삶의 찌끄레기들을 구구절절 증명하고 설득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며, 언제나 현재를 사는 인간이다. 물론 나는 그처럼 같이 살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난 톰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다시 땅의 체취를 끌어당기기 위해, 말하자면 '자존감'이란 딱지를 붙이지 않은 자존(自存)의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글'이라는 멀고 에두른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글자와 육체든 자존과 비굴이든, 혹은 미(美)와 추(醜)든 선과 악이든, 이 세계의 모든 관념과 현상은 중층적이다. 나는 그 중층성을 아예 발로 차버릴 자신은 없다. 그러니 난 계속 공부하고 연필을 끄적여야 하는 인간이다. 어쩌면 이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을 꺼다. 이리저리 도망다니면서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대의 성감대를 언어로 드러낸다는 詩. 연인 간의 애무에나 있을 법한 섬세하고 정치(精緻)한 언어의 '장난'을 볼 때마다, 난 살짝 당황스런 기분이 된다. 저 사람들은 이 부박한 세상에서 저렇게 끊임없이 상상하고, 민감하고 팽팽한 감정선을 담금질하며, 언어를 파고 또 파고 있는 것이다. 돈도 안 되고, 그닥 존경을 받지 못해도, 시인은 시를 쓴다. 삶의 비밀을 벗겨내려 전전긍긍한다. 그것은 끝내 '글의 힘'과 '아름다움의 힘'을 믿고자 하는 여리고 약한 노력에 가까울 것이다. 말을 아끼면서 벼려내는 그들의 고뇌에선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그런 삶의 자세는 내가 여전히 움켜쥐지 못하는 숭고함이기도 하다.
실인즉, 시란 인간의 감수성을 놓고 벌이는 진검의 승부다. 시야말로 대중적 통속성과 자본의 유혹에 가장 얽매이지 않는 예술양식이리라. 좋은 시는 가끔씩 내 가슴을 뻥 하고 친다. 나는 침을 흘리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뿐이다. 그러나 시는 대개 편하게 읽긴 쉽지 않고, 가끔씩 좀 지나친 듯한 작품들도 있다. 시를 위해 쓰여진 듯한 시, 과장된 은유와 수식으로 공감을 애걸하는 듯한 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둘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어떤 게 좋은 시이고, 어떤 게 좋지 못한 시인지 아직 잘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 걸 좀 더 잘 알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글꾸러미를 시작하게 됐다.
앞으로 평일 오전(의 시간을 지키긴 힘들더라도)에 시 한 편과 짧은 단평을 올리는 정도가 될 것 같다. 결국 좋은 시집이 그득함에도, 그동안 내가 너무 시를 읽지 않았다는 자책이 이런 일을 벌이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