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LUMBER

<파이트 클럽>과 <빌리 엘리어트>

Alyosha 2009. 8. 27. 09:33


어제와 오늘, <파이트 클럽>(1999)과 <빌리 엘리어트>(2000)을 보았다. 


<파이트 클럽>은 현란하다. 감각적인 헤비메틀과, 애니메이션이 뒤섞인 파격적인 영상, 속도감, 폭력과 섹스, 브래드 피트의 카리스마, 소비사회에 짓눌린 현대인의 노예근성을 비판하는 주제의식. 그리고 니체적인 세계관. 



현대판 조르바라고 할 수 있는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라는 캐릭터는, 그가 파이트 클럽을 창설하고, "인류가 겪었던 고통을 피하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잭(에드워드 노튼)의 상처에 양잿물을 들이붓는 순간에 딱 절정을 이룬다. 나는 그 캐릭터에 새삼스레 감동받았다. 



안락한 현대소비사회에서, '진짜' 인간이 되는 일은 만만치 않으며,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는 데이비드 핀처의 내공과, 그 내공을 스타일 있게 풀어내는 연출력에 정말 감탄하면서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육체와 고통의 순수함을 예찬하는 딱 거기까지가, 이 영화의 매력이다. 영화의 중반 이후, 스토리는 산으로 간다. 나치를 어설프게 상징하는 '파이트 클럽'의 조직화와 몰락, 이 모든 게 결국은 잭의 과잉된 자의식의 결과에 불과했다는 영화의 종결부는 그야말로 '오버'(혹은 키치?)의 극치였던 듯. 어쩌면, 헬스 클럽에 다니는 미국인을 비웃으며 "캘빈 클라인의 노예들, 헬스란 결국 자위행위에 불과해"라고 말하던 브래드 피트의 몸매는, 그런 대사를 내뱉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훌륭했는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만 보고서는 이 영화가 무어가 그리 작위적으로 느껴지는지 몰랐다가, 오늘 밤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파이트 클럽>이 얼마나 미국적인 영화였는지. 주제가 얼마나 反아메리카적이든간에, 그 주제를 풀어내는 시선과 형식, 스토리전개는 그야말로 아메리카적이었다는 것.



영화는 문제의 근원― 개인을 노예로 끌어내리는 시스템이 기실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개인주의'와 '개인'에 대한 신화화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철저하게 무감각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일부러. 뻔뻔스럽게. 또 허풍스럽게. 영화는 현란한 용어로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데 재미들린 "펜대 운전수"를 닮았다. 꼴불견이다.   



<파이트 클럽>에 '개인'을 넘어서는 관계가 있는가? 타일러도 잭도 말라도, 영화의 모든 이가 공동체적 관계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나 있다. 다 지 혼자다. 아버지를 미워한다. 집을 박차고 나왔다. 죽음을 앞둔 병자들이나 그런 공동체관계를 맺겠지만 그것조차 불안하기 그지없다는 냉소적인 시각.



감독의 자의식과 냉소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냉소할 만하다. 영화에서 그려진 이런 허약한 '개인'은 그 자체로 상투적이고 작위적이다. 이렇게 헐리웃의 가공적인 '개인'을 예찬하는 영화나, 또는 '가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성을 지나치게 예찬하는 영화는 아마도 쌍생아격일 것이다. 균형점은 없다. 치장된 극단성. 왜냐면 '극단'이란 언제나 일정하게 순수하고, 스타일리쉬하기 때문에. 마치 이론으로 무장된 비판처럼.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러한 속물성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빌리 엘리어트> 역시 '육체'를 예찬한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11살짜리 소년을 통해서. 그러나 그 예찬은 <파이트 클럽>처럼 노골적이고 가파르지 않다.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무언가를 진정으로 예찬하는 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예찬을 가로막는 주변의 유무형의 장애물들을 깊이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정말 예찬받을 만한 무언가라면 말이다. 빌리를 둘러싼 가족, 친구, 노동자계급, 파업상황, 좌절한 스승, 마을 공동체, 84년 대처 정권의 영국…에 대한 섬세한 '바라봄'은, 빌리 엘리어트의 춤을 은은하게 예찬한다. 개인과 사회의 '고리'는 영화의 결에 촘촘하게 배어있다. 그것이 '개인'에 대한 예찬을 세련되게 다듬어낸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 중 하나: 파업에 패배한 광부들이 지하 엘리베이터를 타고 땅 속으로 내려가던 씬과 연결되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중력을 박차오르던 발레무용수의 도약 씬. 하강과 상승은 무관하지도 대립되지도 않는다는 것: 땅을 박차오르든 땅 속으로 기어내려가든, 그것은 중력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당당한 의지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크게 떴을' 때에, 우리는 발레의 그랑 주테(Grand Jete)를 보면서 우리는 광부들의 새카만 얼굴과 흐르는 땀, 곡괭이를 보게 된다는 것. 아니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성장한 빌리는 매튜 본이었다고. 그의 도약은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안나 파블로바의 통찰: "산업사회 이전에는, 정직한 남자들이라면 모두 춤을 잘 췄다"는 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