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커스

피해자를 위하여

Alyosha 2015. 6. 22. 23:57




피해자는 언제나 우선적으로 '돌봄'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게 맞다. 가해자는 마땅히 지은 죄에 걸맞는 '지탄'과 '단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 를 둘러싼 직접적인 돌봄/단죄의 관계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서, 소위 말하는 '익명의 대중'들이 넘실대는 '공적 공간'에서,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지지'가 서슬퍼런 무기가 되어 가해자를 전방위적으로 채찍질하는 사태는 정당한가? 가해자의 죄에 대한 조심스러운 성찰("내 안에도 가해자와 같은 욕망이 있었다")을 가해자를 편드는 일로 가파르게 등치시키며 "그것은 약자인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로 환원시키는 태도는 정당한가? 



피해자를 위하는 그 날카로운 논변과 연민의 언어들을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당연히, 가해자는 제가 지은 죄만큼의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그 사태를 멀찍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제3자'들에 의해서는 아니다. SNS와 블로그를 통해 일련의 사건을 파악한 대중이 뭐라고, 그 사태를 얼마나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함부로 누구를 심판한단 말인가? 피해자의 의견이 오로지 피해자의 의견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도 없이, 절대적으로 옳거나 무조건적으로 공감되어야 한다는 시각은 피해자 중심주의의 탈을 쓴 독선과 오만일 뿐이다.(물론, 가해자에 대한 일방적인 옹호는 말할 것도 없다.) 



제3자들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비대칭적이고 비틀린 권력 관계 너머로 사태를 투명하게 환기시키고, 가해자/피해자 간에 올바른 '단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것을 촉구하는 선에서 제 역할을 그쳐야 한다. 제3자들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정의의 사도는 키보드와 모니터 앞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피해자를 이렇게 위하는데 너희는 그런 정치적으로 옳지 못한 말을 지껄이면 안 된다…."와 같은 태도는 이미 저기 '실재하는' 피해자와는 상관없고 그저 자신들의 욕망에 복무하는 '말의 성찬', 자신의 상처와 욕구를 뭇 사람들을 향해 뻗대는 정치의 한 면모일 뿐이다.



정의의 사도가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말해 데이트 폭력과 같이 은밀한 약자에 대한 폭력이 비일비재하고, 강자의 논리와 강자의 문화가 뻔뻔스레 득세하며, 세상을 바꾼답시고 설쳐대는 진보 운동권 진영은 그걸 의도적으로 묵과하고, 약자들을 위하는 수많은 공적 기구들은 효과적으로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사법 시스템은 철저히 강자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소리소문과 비명과 아우성이 흘러넘치는 이 악다구니 같은 세상 속에서, 피해자가 대중을 향해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고, 대중이 팔을 걷어붙이며 "우리가 너의 정의의 사도가 되어줄께"라고 흥분하는 현상은 퍽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스럽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옳지 않다. 그 해법은 '틀렸다.' 우리가 피해자를 정말로 위했더라면, 피해자가 처음 피해를 당했을 때, 그것을 가장 빠르고, 단호하고, 철저하게 공론화시키고 가해자를 엄벌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피해자'의 '피해'와 '아픔' 자체도 훨씬 덜했으리라. 



이미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어쩌란 말이냐고? 지금도 어느 어두운 공간에서 상처받고 있을 당신 곁의 '숨은 약자'를 향해 당신의 직접적인 손길을 뻗어라. 피해자를 구제하거나,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끔 이 사회에 기여하는 제도적/사회적/법적 기구들에 찾아가서 힘을 보태라. 그것은 '지금 이 문제'에 대한 회피가 아니냐고? 단언컨대, 아니다. 대중이 누군가(가해자)를 인터넷 공간에서 매장시킬 수 있고, 어느 순간에는 마땅히 그래야 하며, 그 매장에 주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몰고 가려는 생각과 태도는 교만하고 게으른 자의식일 뿐이다. 그 교만함은 피해자에 대한 진정어린 위로와는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