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커스

禮聞取於人 不問取人

Alyosha 2013. 10. 19. 02:00







禮聞取於人 不問取人(예문취어인 불문취인)

"예(禮)에 (내가) 남에게 본보기가 된다라는 말은 들었지만

(내가) 남을 끌어다 본을 받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 예기집설대전1 /신승운 역주 / 전통문화연구회



그 성격 좋고 털털해보이는 육중완이 친구들에게 몇 년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미여관의 육중완 말이다. 무한도전에 나올 정도로 성공한 그는, 친구 노홍철을 앞에 두고 껄껄 웃으면서 가난한 인디 시절을 회고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친구 얘기가 가슴이 찡했다. 그는 왜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못했을까. 아주 가끔은 친구들에게 술 한 잔쯤 얻어먹고 자신의 음악 얘기도 들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연락은 오랫동안 못했지만, 긴 고생 후 성공한 자신을 보며 요즘 친구들이 너무 좋아한다고 육중완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허물없이 신세를 질 수 있는 것도 친구의 중요한 역할이긴 하다. 그러나 때로는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마음,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하고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자존심이야말로 좋은 친구가 갖춘 할 덕목이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아마 마음이 조금 놓였던 것 같다. 아, 사람이 좋은 것과 스스로의 두 발로 오롯하게 서고자 하는 자존심은 별반 상관이 없구나. 



오늘 몇몇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떠든 후 헤어질 즈음에 육중완이 생각났고, 이어서 <예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자 내가 내 주위의 누군가를 애틋해하고, 그들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던 게 정말이지 낯부끄러워졌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또는 질책할 처지이던가? 나는 지금까지 육중완과 같은 '곤조'를 가진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독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음에도 누군가가 내 본을 받길 바라면서 으스댔던 건 아니었던가? 



좋은 글귀를 트위터로 많이 올려주는 최재천 의원이 오늘 밤엔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인용을 올렸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이 세상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평범함이다. 우리가 자기계발을 하지 않아 평범해진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사명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평범해질 틈이 없다.” (마사 그레이엄, <고뇌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