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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DJ의 야밤선곡

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 OST - Country Road





지난 일요일 오후, 서울을 출발하여 김해와 밀양의 큰댁과 산소에 다녀왔다. 돌아온 시간은 오늘(화) 새벽. 긴 거리를 아버지와 나눠서 운전했고, 차는 귀경길에 조금 막혔다. 가는 길이 네시간 반쯤, 오는 길이 다섯시간 반쯤 걸렸다.


이번에 모인 친척들의 수는 전보다 좀 줄어들어 있었다. 다들 별 일이 없는 듯했지만 제각기 삶의 '큰일'들을 치르며 이 사바세계의 운명을 완성해내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 말이다.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그네들의 상황은 대개 좋은 경우보다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마음이 아팠다.  


거기서는 나와 '놀아줄' 사람이 없는 점이 제일 힘들었다. 미친듯이 심심한 게 그야말로 "꿔다 만 보릿자루"란 속담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었다. 나와 나이차가 엇비슷한 밀양과 김해, 마산의 '조카'들은, 항렬도 항렬이지만, 뭣보다도 일년에 한두 번도 볼까 말까 한 서울의 재미없는 '삼촌'한테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건 퍽 씁쓸한 느낌이었다. 


반면 내가 막내 비스무리하게 쫄래쫄래 쫓아다니던 '형님'들은 인생의 3~40대를 맞아 각기 표류 중이었다. 한 명은 미국에, 한 명은 일본에 나가서 몇 년째 얼굴을 못 봤다. 딸-딸-아들의 3남매를 줄줄이 낳은 형 한 명은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없었지만, 나는 이 형의 조용한 무뚝뚝함이 참 좋다. 이들 중 맏이인, 뒤늦게 시험을 준비하는 40대 초반의 형과는 안철수와 천정배, 민주당과 박근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형님은 아침 제사만 지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1박 3일간 아버지와 두 번을 대판 싸웠는데, 한 번은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맥주 두 캔을 마셨고, 한 번은 아버지가 답답함을 못이기고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그들의 약한 모습을 보며, 이번에도 부모님을 모시고 (아버지의) 고향에 다녀왔지만, 거기는 누구의 고향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와 싸운다는 것은 괴로운 일인데, 그것은 그들의 단점과 약점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태생적인 씨앗과도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번 추석에도 몇 가지 다짐한 게 있다.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추석 시즌 라디오에서 두 번 들었다. 한번은 배철수의 음캠에서 존 덴버 특집을 꾸며주는 시간이었는데, 존 덴버의 당시 엄청난 인기가 그에게서 "진정한 미국"을 찾으려는 미국 대중들의 덕택도 컸다는 해석을 소개해주었다. 1970년대는 워터게이트와 베트남전 실패 등 미국의 정체성이 심각한 위기와 혼란에 처했던 시절이었고, 이런 혼란이 바로 존 덴버의 복고적인 '컨트리록'의 열풍을 낳았다는 것. 


방금 음악캠프 작가가 참고한 임진모의 1996년 평론을 읽었다. (http://bit.ly/qqlUlk) 임진모는 위의 미국 상황을 소개한 후 "그는 1970년대 중반 미국 상황이 불러낸 가수일 뿐이었다"고 혹평하는데, 어쨌거나 록의 역사에서는 그것이 맞는 것이겠지만, 일단 그 가사도 역시 유치하기가 그지없다. 이 퇴행적인 가사는 열두 살짜리 꼬마가 엄마젖을 빨겠다고 투정부리는 걸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멜로디는 아름답고, 특히 나의 부모 세대의 가슴속엔 감미롭게 간직돼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곡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귀를 기울이면>의 OST이며, 영화 중간에 삽입되어 여주인공 시즈쿠가 남주인공 세이지 등과 함께하는 'Country Road'이다. (2015. 6. 17. "저작권보호센터 사이버팀 재택모니터링파트"에서 네이트 동영상 삭제 요청이 온 듯하여 동영상을 내리다. 흠...) 존 덴버의 원곡보다 훨씬 더 멋진 노랫말임이 분명하며, 특히 이 노래와 영상에는 오래전부터 내 가슴을 촉촉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서 한참 즐겨 들었었다. 그 촉촉함은 내 나약함이기도 할 것이지만….



이 작품은 월간지에 연재되어 대히트를 친 히야기 아오이의 만화를 원작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과 콘티, 각본을 맡고 그가 후계자로 낙점했던 콘도 요시후미가 감독을 맡았다. (히야기와 콘도의 대담http://bit.ly/nSIuDA) 콘도 요시후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3년 후인 1998년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