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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커스

다니엘 데넷 들추기




(…)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다른 모든 심적 능력과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에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 경과상에 널리 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뇌 속의 작은 인간(이 경우에는 의사 결정자, 시계 보는 자, 동시성 판단자)이 해낸다고 생각했던 작업을 뇌의 시간, 공간상에 일단 분배하고 나면, 도덕적 행위자도 마찬가지로 뇌의 시간과 공간상에서 분배를 하여야 할 것이다. 당신 자신이 핵심 고리(loop)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리인 것이다. 당신이 그만큼 큰 것이다. 당신은 외연이 없는 어떤 점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것들, 당신인 것(what you are)은 일어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지, 이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신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지금까지 마음을 끄는 위압적이었던 구별인 '무의식적으로 시작된' 심적 활동과. 그러고 나서야 (간절히 접속되어 들어가기를 기다리던) '의식에 들어오는' 심적 활동 간의 구별을 버릴 수 는 것이다. 의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심적 활동에 대하여 당신이 지녔던 반응들 중 많은 것이 실제로는 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손(몸)'은 그만큼 시간, 공간상으로 멀리 도달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정말로 아주 작게 만들 수 있다면, 당신은 거의 모든 것을 외재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이 책 Elbow Room에서(143쪽) 가장 중요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어리섹게도 괄호 속에 넣는 잘못을 범하였었다. 그 이후, 나는 그 실수를 여태껏 교정하고 있다. 점 같은 자아라는 개념을 버리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여러 시사를 도출하면서. 물론 내가 반어적 표현을 쓰면서 강조하였던 것은 그 반대이다. "당신 자신을 크게 만듦으로써 얼마나 많이 내재화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라는 것이다. 


뇌의 어딘가 특별석에서 우리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인형술사처럼 우리 자신을 보던 단순한 관점을 버린다는 것은 놀랍게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결정을 내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명백하고 또렷한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지탱해 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복잡할 때, 다른 어떤 관점이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거기에 집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네엘 데넷 석학연속강좌(2002, 한국학술협의회) 세미나: 
자유의지에 대해 인지과학이 말해주는 것 中





대학 때 배웠던 가르침 중 내 지적 갈증을 가장 빛나게 채워준 이 문장들을 보라. 우리가 무언가를 '의식'하기 이전에 우리 뇌에서는 그 순간보다 아주 근소하게(소수점 몇자리의 초단위로) 앞서 이미 그 '의식'의 신호를 보낸다는 실험결과에 대한 데넷의 평이다. 예컨대 "난 배가 고프다"라는 생각을 하기 이전, 우리 뇌의 시냅스와 신경세포들은 이미 그 '생각'에 관한 화학물질을 전달하고 있다는 말이다. 비너스 윌리엄스가 테니스공을 칠 때, 그녀가 테니스공을 치는 '행동'은 (공을 치겠다는) '의식'보다 앞서 벌어진다. 그녀가 그동안 해왔던 수만 번의 기계적인 스윙이 그녀의 뇌에, 혹은 그녀 자신에게 배어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르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는 연구결과다. 


철학과의 심리철학 전공 강의에서 배웠던 내용이다. 이 강의를 맡았던 이상욱 교수님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교수의 모습과 아주 가까웠다. 풍성한 텍스트로, 재밌게 강의하고, 학생들과 교감하고, 성실하게 연구하는… 교수님은 요새도 다양한 저술과 칼럼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데넷의 저 흥미진진한 논변은 자유의지에 관한 오래고 복잡한 논쟁의 한 축을 장식하고 있고, 그의 맛깔스러운 대중적 글쓰기는 커다란 인기를 끌며, 여전히 많은 학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심리철학 · 인지과학계에서의 데넷의 전반적 이론이 얼마나 옳은지 그른지 나는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철저한 유물론적 사고("당신은 당신의 뇌이며, 당신의 뇌는 당신이 그동안 쌓아온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행동의 축적이야.")는 내게 대단한 충격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당신'은 없다. '당신이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당신을 크게 만드는 줄 아는가. (이 얼마나 불교적인가.)


내가 굳이 대학 때 즐겁게 배웠던 인상깊었던 구절을 이렇게 옮겨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지과학적 행태주의와 불교철학의 연관성을 '건드리는' 것에서 넘어가 '파고드는' 단계에까지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독서가 필요할까. 수전 손택은 롤랑 바르트에 대해 "그는 독서를 하느라 글을 쓰지 못할 만큼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내게 지금 부족한 것은 독서인가, 글쓰기인가, 둘 다인가, 둘 다가 아닌가. 뭐든 간에 뒤를 다 돌아봤으면,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내 앞으로 권력과 명예를 움켜쥐진 못할지라도, 젊은 시절의 산만했던 호기심들 덕택에, 결코 정신적으로 <납작한> 인간이 되진 않으리라고 믿곤 있다. 밥벌이가 좀 걱정이긴 하지만.


그 산만함을 튼튼한 매듭으로 묶을 수 있을까, 없을까. 이런 괴로운 '과거문서정리'는 언젠가 꼭 한 번 하기는 해야 했던 일이기는 하다. 엉킨 실타래를 풀지 않은 채 그 엉킮을 방치하면 이렇게나 버거워진다는 교훈, 요새 몸으로 아주 잘 느끼고 있다. (생각하는) '나'는 가짜다. 내가 뭘 하느냐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