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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SLUMBER

화이: 괴물은 그리움이다 @nbamania







얼마전 영화 <화이>를 봤는데요. 영화에 대해 짤막하게(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생각해 봤습니다. 영화의 호불호와 스토리라인의 완성도를 떠나서, 영화의 각본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대해서요. 특히 괴물에 대해서 말이죠.



<화이>에 나오는 괴물은, 기본적으로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정신적 피폐함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사실 이러한 소재("버림받은 무의식=공포스런 괴물")는 상당히 많은 예술작품이 다루고 있는지라 전혀 새롭지는 않습니다. 어떤 면에선 이 영화는 "핏줄 예찬의 시나리오"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화이의 분노는 (좀 뜬금포일 정도로) '친부모'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친부모와 의붓아비들의 대립구도는 '성스러움'과 '추악한 범죄'라는 이분법을 통해 구현되고요.



1. 사랑


그런데 화이, 즉 여진구는 사실 버림받지 않은 존재입니다. 여진구는 훌륭한 부모 밑에서 굉장히 평화롭고 따스한 사랑을 받은 유년기를 보냈지요. 여진구는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았는데 버림받은 존재처럼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장과정에선 괴물이 늘상 등장합니다. 의붓아비, 특히 김윤석에게 학대에 가까운 '의붓사랑'을 받을 때 괴물은 화이에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괴물'은 무엇일까요. 괴물은 '그리움'의 형상화가 아니었을까요. 괴물은 '나는 사랑받고 자랐다'는 여진구의 무의식이 아니었을까요. 즉 <화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괴물은 단순하게 '버림받음'의 상징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화이의 무의식 한편에 존재하고 있던 유년기 친부모의 사랑, 그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괴물로 나타나고 있던 거죠. 여진구는 그것을 겁내고, 김윤석은 그 괴물을 직면할 때에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압박합니다. 결과적으로 김윤석이 맞았습니다. 여진구는 자신의 '진실'("나는 사랑받고 자랐다")을 대면하는 순간, 자신의 진실을 박탈했던 5명의 의붓아비들을 처형하리라 마음먹으니깐요. 괴물은 핏줄(부모자식)간의 비이성적인 유착감, 본능적인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는 거지요.



2. 버림받음과 타락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김윤석의 '괴물'은 영화에 한층 더 깊이를 더해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세상에는 엄연히 자식을 내다버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핏줄의 유대감을 거부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와 본능을 포기한 이들이죠. 김윤석과 그 친구들, 버림받은 아이들은 기독교가 신앙의 이름으로 운영하는 성지재단의 보육원에 맡겨집니다. 



어린 김윤석, 그 누구에게도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을 받아보지 못했던 김윤석은 신앙에 기대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또한 의붓아들 화이처럼 괴물을 보았노라 고백합니다. 그는 괴물의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자 아예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한' 타락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지요. 그리고 괴물을 없애는 데 성공합니다.



김윤석은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이라는 괴물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버림받은 김윤석을 '거두어주었던' 기독교의 신앙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봅시다. 물론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일 수 있겠지만, 특히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와 가르침은 바로 이 세상 만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지요. 하느님은 만인을 사랑하시며, 이 세상에 진정한 차원에서 '버림받은' 존재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설파하지요. 



여진구가 부모에게 사랑받았던 존재라는 것은 현실 차원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김윤석이 하나님에게(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이에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은 기독교 차원의 진실입니다. 두 개는 물론 차원이 다르고, 신앙인이 아니라면 후자에 대해 당연한 의심을 제기하겠지만, 어쨌든 기독교의 인간관에 비춰보았을 때엔 후자 또한 전자만큼 명명백백한 진실인 것이지요.



김윤석은 (착한 교회 형이자 교회의 선택받은 아들이었던) 이경영에게 끔찍한 죄를 저지른 탕아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비록 친부모에게 버림 받았지만, 더욱 높은 차원의 '부모님'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에게 사랑받았다는 진실에 대한 그리움("괴물")을 죽여버린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인간'(여기서는 기독교적 느낌이 강한)인지라 자신 안의 모든 '무의식적'이고 '존재 이전의' 신앙심'을 빼앗지는 못했지요. 



3. 심판


저는 그런 상징들이 영화에 중요하게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경영의 아들 화이를 죽이지 못했던 것이 그렇고, 성지재단의 시각장애인 안마사를 죽이지 못했던 것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흥미롭게도, 자신이 강간했던 젊은 교회 형 이경영의 여자친구를 끝내 데리고 살아가는 게 그렇습니다. 이건 정확하게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끊어내지 못하는 죄책감 말예요.



김윤석은 여진구에게 아버지 이경영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남아있던 과거의 씨앗을 완전히 묻어버리려는 동시에 의붓아들 여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타락한 아비의 욕망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질서이자 이 세계의 질서인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철저하게 전복하려는 시도입니다. 그것은 실패하지요. '나는 사랑받고 자랐다'는 진실을 알게 된 여진구 때문에 실패합니다. 여기서 여진구의 심판은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집단살육신의 시퀀스에서 하늘의 '빛'으로 현현하던 여진구의 총격이 그런 상징이지요. 



영화의 마지막 씬, 타락한 개발업자 문성근을 심판한 뒤의 바로 그 씬에선, 영화에 마침표를 찍듯 적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붉은 십자가가 풀샷으로 선명히 잡힙니다. 하나님은 만인을 사랑하지만, 사악한 자, 자신의 율법을 어긴 자를 엄격하게 심판하지요. 인간은 모두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실을 외면한 김윤석도, 무리한 재개발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켰던 문성근도 모두 하나님 앞에선 범죄자이자 적그리스도입니다. 화이가 이들을 처단하지요.



저는 이 영화 전반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제작자 이창동의 향취를 많이 느꼈습니다.^^ 이창동이 한평생 고민했던 주제 역시 기독교의 범주 안으로 수렴하니깐요. 실제로 이창동이 얼마나 이 작품의 완성에 손을 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제가 너무 오버스러운 해석을 했다고 눈을 찡그리고 계실 것 같군요. "<화이>의 괴물은 그리움이다." 이 한 마디에서 시작된 글이 줄줄 제멋대로 흘러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