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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SLUMBER

못생긴 자식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못생긴 자식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라틴 속담이라고 한다. 어느 책이었는지, 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때부터 인상이 강렬해서 그 이후론 늘 이에 대해 곱씹어왔다. 그런데 얼마전, 홍상수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였다. 내가 영화와 연관시켜 이 속담을 언급하자, 놀랍게도 몇몇 사람들은 내가 이 속담에 무릎을 치는 이유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나 역시 이 속담이 왜 그렇게 통찰력 있는지 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하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래서 이번 글에선 간단히 이에 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왜 못생긴 자식에겐 어머니가 없는지를. (내가 줄곧 말하고 있는 '어머니'는 일단 '아버지'를 포함하는 '부모'의 메타포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먼저 이 문장의 주어부와 술어부를 바꾸면 이렇다. "어머니에게는 못생긴 자식이 없다." 그러면 이 문장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다"라는 말을 상기시키는 평범하고 일차원적인 명제로 바뀌어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일은 아니다. 어머니에게야 당연히 못생긴 자식이 없다. 물론 장난처럼 자식에게 '너 참 못생겼다'고 말하거나 또 얼마간은 그렇게 생각하는 어머니야 적지 않다. 슬프게도, 나의 어머니도 그랬다. 어릴 땐 "나랑 니 아빠가 낳은 작품치곤 네 얼굴은 썩…."이란 어머니의 농담이 어찌나 폐부를 후벼파던지. 그러나 좀 더 깊은 관점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정말 '못생겼다'고 생각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말하자면 '세속'의 기준에 앞서는 '핏줄'의 기준도 있는 것이다.



자식을 정말로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격이 없다. 왜 그런가? 첫째, '못생겼다'는 개념 앞에는 자연스럽게 '다른 누군가보다'란 비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어머니'는 그렇게 비교하고 계산하는 개념이 아니다. 나도 학창시절 어머니가 마르고 닳도록 '친구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칭찬했고, 또 그것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게 사실이지만, 내 어머니가 나보다 그 친구아들을 '존재론적으로 우월하게' 생각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런 깊은 차원의 믿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굉장히 끔찍한 일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보다 1)'못생겼고', 그러므로 2)'가치가 없고', 그러므로 특수한 상황에선 어머니에게 3)'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걸작 <몬스터>의 '순수한 악(惡)' 요한이 바로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던가.



둘째, 어머니가 제 자식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수준의 과학지식을 반복하는 꼴이지만, 자식은 어머니의 유전자 반에, 어머니가 사랑해서 선택한 사람의 유전자 반으로 탄생한 존재다. 적어도 아기 시절에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을 함부로 내팽개치는 어머니들이 정기적으로 뉴스거리가 되는데, 사실 그런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난 너가 싫어. 너는 내게 못생긴(가치가 없는) 존재야.'라고 자식에게 고백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우리가 프로이트의 구순기 항문기 블라블라 이론을 신봉하거나, 또는 반대로 그의 학설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아예 걷어차 버리더라도, 자식이 생물학적으로 취약하기 그지 없는 어린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니 어머니가 진정 자식을 형편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꼴과 다름없다. 반면 든든하고 성숙하게 자라난 자식을 보면서는, 어머니는 스스로의 지난 삶을 긍정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독립된 개체로 홀로 서는 만큼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이제 '어머니에게는 못생긴 자식이 없다'는 문장의 의미는 어느 정도 해석이 되었다고 본다. (여러분께는 아닐수도 있지만….) 그런데 이제는 주어부와 술어부를 바꾸지 않은 본래의 문장, 즉 '못생긴 자식에게는 어머니가 없다'는 속담을 한꺼풀만 더 벗겨보자. (이 문장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위에서 강조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저 자신에게 타인(세속)의 욕망과 기준을 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못생겼다'는 개념은 물론 내가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작은 눈과 뭉툭한 코 때문에 안타까워 하는 그런 의미의 '못생겼다'는 생각이 아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저 깊은 내면의 차원에서의 '자기부정'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대체 '못생긴'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은 모두 못생긴 외모를 얼추 떠올릴 수 있지만, 그게 정말 못생긴 외모인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팔다리가 하나 없으면 못생긴 건가? 둘다 없는 사람은 더 못생긴 것인가? 얼굴에 너무나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도 못생긴 것인가? 물론 이 세 사람 다 (세상의 기준에선) 못생긴 게 맞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며 천사같은 얼굴로 "당신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종교적 사회가 이상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외모는 누군가보다 불완전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당연히 그런 사실을 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유명한 <낙인Stigma>이라는 책에는 그렇듯 남들보다 많이 '못생긴' 장애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어떤 말과 행동, 유머와 제스처를 보여주는가에 대한 사례가 가득하다. 그들은 못생겼지만, 그리고 때로는 그 사실이 비통하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또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켜나간다. 그들은 못생겼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못생긴 게 아니다. 고프먼에 따르면, 우리든 그들이든 모두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연기를 할 뿐이다. 사실, 누구나 장애를 가질 수 있지 않은가? 바로 내일 내가 '그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말했던 '장애'도 하나의 비유다. 삶의 어려움과 혹독한 좌절에 부딪쳤을 때(누군가가 당신에게 '못생겼다'고 말했을 때) 그 외부의 타격에 굴복해버리고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못생긴' 사람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즉, 그들에게는 '나'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아껴줄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내면의 힘("어머니")이 없다. 평평한 '세속'의 기준을 뛰어넘는 더욱 높은 차원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 발판이 없다는 말이다. 남들의 천박한 시선에 허덕이지 말고 자신만의 규칙과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계의 '뜨거운 오빠' 니체의 말은 실로 정확했다. 어쨌든 우리들은 때때로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때로는 이정도면 퍽 괜찮다고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사실 삶으로만 따지면 우리가 니체보다 못할 게 없다.) 그리고 그런 선택의 순간들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들은 앞으로도 웬만하면 후자 쪽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낫겠다. 당신과 나 모두에게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잔소리는 좀 심해도 말이다.



※ 내가 '부모'라는 개념 대신 굳이 '어머니'라는 말을 계속 썼던 것은 의도적이었다. 그 이유는 독일의 심리학자 한스 요아힘 마츠가 쓴 <릴리스 컴플렉스>(참솔, 2004)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물론 '어머니의 모성'을 무턱대고 중시하는 보수적인 여성관을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9달간 잉태되는 한,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다. 그 말인즉슨 '어머니'(또는 '여성')가 병든 사회는 그만큼 심리적으로 더 위험하고 불안하다는 말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