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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SLUMBER

화차(火車), 사람의 근본 찾기






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를 뒤늦게 봤다. 미야베 미유키의 원작 소설과 얼마나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 현대인의 '근본(根本) 찾기', 즉 뿌리 찾기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근본'이 없는, '근본'을 상실한 존재가 바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화차다. 자신을 태우고 남에게 불길을 옮기는 절박하고 위험한 악귀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안위를 가장 우선에 둘 수밖에 없는 존재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성의 근본이다. 누군가와 오래 만나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이 "행복해지고 싶은" 본연적 이기심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이다. 내가 행복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리고 내 행복이 나와 가장 가까운 이에게 전염될 수 있게끔 바라는 마음이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내가 먼저 사랑의 안정된 경험을 누려봤어야 한다. 그 경험의 한복판에는 '보호'가 있을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과 빈궁 속에서 자라며, 누군가에게 물질적 · 심리적인 보호를 받아보지 못한 '벌거벗은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영화의 마지막, "날 사랑하기는 한 거냐"는 장문호(이선균)의 질문에 차선경(김민희)이 고개를 저으며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인간관계의 '뿌리'가 단절되고, 굳이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찾을 필요가 없는 현대사회의 상징은 영화 곳곳에 편재되어 있다. 영화의 발단은 속도와 이동의 상징인 고속도로 휴게소이고, 십수 년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사촌형과 사촌동생의 관계가 설정된다. 주인공 문호의 직업은 진짜 사람보단 '유사-사람'의 즐거움을 주는 동물병원 원장이다. 회사의 직원이 실종되도 무관심한 선경의 부서 직원들도 마찬가지고, '천일 동안 혼자 사는 젊은 여자를 스토킹하는 찌질남'이라는 우스꽝스럽고 일본적인 캐릭터도 등장한다.



오히려 자신의 뿌리 때문에 아무런 죄 없이 고통받는 캐릭터가 바로 차선경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파산과 사채빚 때문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처절한 고통을 겪은 후 괴물이 된다. 그녀에게는 피붙이의 얼굴이 곧바로 재앙이다. 자신의 아버지의 시체를 직접 봐야 자신의 최소한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기막힌 삶을 살아왔다.



반면 장문호와 그의 사촌형 김종근(조성하)의 배경도 재미있다. 둘의 고향은 '양반고장'인 경상북도 안동이고, 장문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어른'으로 설정된다. 문호가 선경과 헤어졌다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대뜸 날라오는 말이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과 사귀더니… 고향 사람들에게 청첩장 다 돌렸는데 무슨 망신이냐…"이다. 유교사회의 수직적 관계성과 체면 윤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그러나 우리 사회엔 여전히 강고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종근이 아내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들을 보는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소홀히 다뤄진 '구멍'이 아닐까 싶었다. 종근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소설의 혼마 형사에 비해 비중이 크게 줄었던 탓인 듯했다. 아마도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선 종근과 그의 아내의 심리적 갈등이 더욱 세밀하게 그려져있을 게 분명할 것이다. 아마도 종근의 뿌리는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을지 싶다.



어쨌거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사람의 근본 찾기' 과정을 보면서, NHK에서 몇 년 전 펴냈던 <무연無緣사회>란 책의 내용도 떠올랐고,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차>가 아감벤의 정치주권과는 별 상관이 없는 내용일지라도, 아감벤의 말은 선경의 삶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은 호모 사케르의 추방이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방식인 동시에 "인도주의는 삶을 신성화함으로써―죽여도 좋은 상황은 문제 삼지 않은 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을 반복함으로써―삶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화차>는 그 무서운 돈과 폭력의 굴레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차선경을 시종일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으른 인도주의나 전통주의적 가치관, 또는 쿨하고 속 편한 사랑이라는 허울을 걷어내고 타인의 '근본'을 찾아주려는 마음이 과연 유효할 수 있을까. 단 한번도 사랑다운 사랑, 보호다운 보호를 받아보지 못했던 '벌거벗은 생명'을 이 세계에 편입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