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율이란 개념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A'와 'not A'라는 두 명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모순율이다. '나는 회사원이다'와 '나는 회사원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나는 공부를 잘하면서, 동시에 공부를 못할수는 없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국민이 아닐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모순율이란 논리적 사고가 일상의 차원으로 건너오면 참으로 피곤해진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성격의 차원에서 이런 사고가 남용되면 거의 환장할 지경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단순한 논리구조에 충실한 사람은, '나는 A를 좋아하니 절대로 not A를 좋아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또는 나는 A를 해야 하니깐 not A를 할 수 없다, 나는 A류의 사람이므로 not A류의 행동을 내게서는 기대하지 말라, 그것을 기대하는 일은 당신의 욕심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내비치는 심리와 행동은 이를테면 이렇다. ●나는 본래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니깐 내게서 웃기거나 재미있는 모습을 기대하지 마. ●내 삶의 목표는 이러이러하니 이 목표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고 싶지 않아. ●나는 네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으면 좋겠는데 니가 그걸 하지 않는다면 너와는 끝이야. ●나는 내 삶을 독립적으로 책임지고 싶은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을 챙기는 일을 기대하지 말라니깐.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좀 더 나아간다면, ●내 종교(인종/민족 등)는 이런데 니 종교(인종/민족 등)는 왜 그 따위니. ●난 이렇게 잘나가는데 너는 왜 내게 복종하지 않니, 왜 내가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써야 하니, 등등.)
삶은 논리가 아니다! 삶의 디테일은 얼어죽을 논리학이나 논리법칙과 아예 다른 세계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런 식의 논리구조가 우리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처럼 굴면서 타인을 규정하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내면에 유머러스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는가? 아니, 재미없다는 관념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실제 삶에선 영 부끄럼을 타다가도 원고지 위에선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그려내며 붓이 춤을 추는 작가들을 생각해보라.
A와 not A가 절묘하게 배합되는 것이 인생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다. 삶의 목표가 높은 자리와 달콤한 권력을 얻는 것이라고 해서 오로지 인생을 마키아벨리의 교범서처럼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랴. '내가 네게 어떤 행동을 하길 바라는 것'과 '네가 나의 말에 공감해서 그 행동을 하는 것' 사이의 시간편차와 변화의 진통이 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강인한 사람이란 자부심과 다른 사람을 살뜰하게 챙기지 못하는 성격의 특질은 기실 아무런 관계도 없다. 대개 그것은 그저 후자의 단점을 면피하려는 전자의 자기이상화에 불과하다. 두 발을 딛고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도 가까운 타인과 정성껏 교감할 줄 아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널리고도 널렸다.
인간의 특질과 그 관계의 미묘함을 딱딱하게 굳은 논리학의 명제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비극이다. 우리 안의 심성은 '이것'이면 동시에 '저것'이 될 수 없는 논리적 변수가 아니란 말이다. (이 논리학적 심성은 참과 거짓, 지배와 굴종을 가르는 집단의 이분법적 맹신이나 편견과도 무관치 않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자신의 성격을 흐르는 시간과 상황 속에서 절대불변의 상수처럼 생각하는 태도는 사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자 '나'를 깨뜨리지 못하는 무능함의 다른 얼굴이다. 스스로의 욕망과 성격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상황과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무능력 말이다. 사람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늘 변할진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너는 그런 사람이야' 하는 틀에 얽매이는 일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독일 정신과 의사의 지혜로운 말을 빌려, 건강한 자아는 "특징이 없다"고 정리하도록 하자. 건강한 자아는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이 가진 가능성의 실현을 위해 애쓰고, 주위의 환경에 늘 적절하게 적응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거나 주장하고, 협상하고, 다른 이의 의견을 수용하며, 늘 변화할 줄 안다. 누군가가 가진 '변할 수 없는 성격'이란 정확하게 상처 받은 자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자아의 신음소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나는 이런 사람이니깐 어쩔 수 없어, 라는 말을 발로 힘껏 걷어차자.
너는 그런 사람인데 어쩌라고? 까지 마라. 이런 사람 그런 사람 같은 거 없다.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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