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택시는 詩를 싣고

자화상 / 채호기






자화상 / 채호기


 너는 갇혀 있다.
 너만 바라볼 수 있는 너의 거울 안에, 너는 갇혀 있다.
 네가 잠드는 집과 출근하는 회사, 네가 말하는 언어의 벽들이 너를 감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감옥 안에서 너는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아무도 너를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조차도 네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거의 포박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 모국어의 감옥, 자각할 수조차 없는 거울의 감옥!
 새봄이 오면 새 풀들이 자란다. 너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새로운 언어들이 거품처럼 일어난다.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거품은 희망인가? 비눗방울들은 터지고 사라진다.
 새파란 목장에는 소들이 풀을 뜯어 먹지 못해 야윈다. 풀들이 말한다. 군데군데 흰 꽃들, 손 흔드는 언어들. 소들은 먹는다. 말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되새긴다. 네 통화 방식으로는 소들이 더 이상 파릇파릇한 초록 귀에 속삭일 수 없다.
 언어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부랑자들의, 불쌍한 사람들의, 포기하는 사람들의 언어. 네게서 자라나는 언어들은 얼기설기 얽힌 가시철조망, 강철프레스 같은 세계가 골통을 압박하듯 너의 생활 반경을 옥죈다. 태풍과 어울리는 기차.
 네 주위에는 너를 발견하는 눈이 없고. 너 또한 너를 바라보는 시선의 독방에 잠겨 근심과 피로를 녹여 없앤다. ─좁고 깊은 한없이 꺼져드는 목구멍이여! 시야에서 아득해지는 길고 긴 기찻길이여!
 너는 더 이상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너는 목줄에 묶인 원숭이인데, 거울에 비친 너를 보는 너의 눈동자는 사라져버릴 허망한, 그러나 물리적인 빛의 환영을, 너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탐색한다.
 구경꾼 가득한 서커스 천막이 네 거울 속에는 고독의 깊은 복도이다. ─아아, 어떤 언어도 한숨으로 번역되는 물결도 깊이도 없는 거울 표면이여! 얕은 미궁의 착란이여!




 잔인한 시다.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난도질하는 시다.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를 갱신하지 못하고, 그런 사람은 산 게 아니라 죽음과 가까운 불쌍한 사람인데, 그게 나다. 내 자화상이다. 소들을 야위게 만들고, 태풍 속 기차처럼 위태로우며,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 쇼를 하는 서커스를 하는 자화상이다. 


 양귀자의 <모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고,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마리 다리외세크의 <가시내>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잘못한? 이게 무슨 뜻이야? <그건 우리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뜻해.>"


 나는 갇혀 있다. 그러나….






'택시는 詩를 싣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봉裁縫 / 김종철  (0) 2015.06.05
푸른 밤 / 나희덕  (0) 2014.10.04
연인 / 김종삼  (0) 2013.12.30
신 벗고 들어가는 곳 / 황지우  (0) 2012.12.07
배우를 위하여 / 정현종  (0) 201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