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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詩를 싣고

푸른 밤 / 나희덕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 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사랑을 잃고, 우리는 쓴다. 사랑과 치욕, 오욕칠정과 자기파괴를 넘나드는 젊음의 길을 갈아마시고, 다시 우리들은 혼자가 되었다. 그때 그 사랑이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고 굳건히 믿으면서 누군가를 향해 걸었지만, 그 길은 그저 욕망과 혼란과 착각, 그리고 자기기만이 빚어냈던 화려한 지름길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제 아무도 믿지 못한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미워한다. 치욕에 허우적댄다.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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