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한겨레 기사. 씨네21 이다혜 기자는 글을 참 맛깔스럽게 쓴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90년대에 대학을 다니진 않았지만, 나 역시 '하루키 키드'다. 중학교 시절, <해변의 카프카> 이전에 나온 그의 모든 소설들을 집앞의 문구/도서 대여점에서 빌려와 참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에 하루키는 그저 '어린 시절 잘 읽었던 대중작가' 정도로 가볍게 기억하다가, 얼마전 동네 카페에 진열되어 있던 <1Q84>를 펼쳐 들곤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하루키의 문장들에게서 강렬히 풍겨져나오던 대가의 향기. 미처 예기치 못했다. 1권부터 3권까지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그저 '유행에 걸맞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트렌디한' 뭐 이런 수식어에 어울리는 작가의 이름일 줄만 알았건만, 그는 그런 자기 색깔을 훌쩍 뛰어넘어서, 이 세계와, 사회와, 인간에 대해 진중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뛰어넘었지만, 여전히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앞으로도 놓지 못할 이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래는 이지혜 기자의 문장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5548.html)
이제 30대 중반이 된 주인공은 고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서야 새롭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포장을 뜯어 버린 상품은 교환할 수 없거든.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그리고 얻은 답은, 사랑.
한국에서는 밀란 쿤데라가 지나간 자리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착했다. (…) 90년대 중반을 20대로 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지 않기란 물 위를 걷기와 같았다. 아무리 조심하면서 걸어도 결국은 그 안에 한번은 빠져 벗어날 수 없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위해서는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사유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알아야 했는데, 하루키를 읽는 데는 20세기의 미국이면 충분했다. 세대를 이어 축적되어온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고상한 어떤 것을 하루키가 주고 있었다.
소설가 김미월씨는 소설을 쓰다가 막힐 때 90년대에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하루키 단편집을 꺼내 아무거나 읽는다. “하루키의 단편을 읽어보면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멋진 이야기를 뽑아낸다. 큰 욕심 안 내고 일상의 한 조각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데서 용기를 얻는다고 해야 하나. 중요한 건 이거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을 때까지 이게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이야기라는 걸 독자가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매일 오르내리는 아파트 계단에서 휘청할 때, 순간 일상의 기묘한 틈을 발견하는 것 같은 아찔한 순간에 대해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하루키 아닐까. 막상 써보면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담론이 쏙 빠진 채 이야기되는 하루키 ‘현상’을 음악 칼럼니스트 김윤하씨는 서태지에 비유했다. “실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겉에 드러난 다른 요소들과의 화학작용이나 제3의 이야기에 더 열광하고 집중한다. 소설 자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화려한 것들에 가려졌다. 하루키가 새롭지 않다고 하는데, 40여년간 글을 써온 꾸준함과 거기서 기인하는 대중의 애정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구나 가슴에 하루키 책 한 권쯤 품고 있는 것 아닌가.”
장편소설을 특히 좋아하고, 책을 안 읽는 동료 의사들도 하루키는 다 읽는다고 들려주었다. “내 세대도 아니고 80년대생이었는데, 그게 참 신기했다. 군대에 간 후배는 <1Q84> 다음 권을 읽고 싶어서 휴가를 기다렸다고도 하더라.” 비슷한 이야기는 소설가 김이설씨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친구 남편이 육아일기를 쓰는데, 거기에 하루키에 대해 썼단다. “얘야,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야.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단다. 너도 언젠가 이 글을 읽고 하루키를 읽길 바래.”
꿈이건 사건이건 비일상을 통해 일상을 통렬하게 깨닫고 다시 손에 꼭 쥐게 만드는 힘은,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만이 갖는 특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90년대의 열광과 라이프스타일의 유행, 21세기의 마케팅을 넘어서, 하루키가 아닌 하루키의 소설을 대면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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