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오바마가 사실상 재선됐다. 오바마를 응원했던 입장에서 축하하고 다행스럽다. 더불어 그가 재임기간 중에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폐기했던 클린턴 같은 행보를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글래스-스티걸 법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이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을 금지했던 것. 부시 부자(父子) 이전에, 이미 이 법안의 폐지가 2008년 금융위기의 직접적 뿌리가 됐다는 지적이 많다.
오바마의 당선에 큰 도움을 준 허리케인 '샌디'. 많은 이들이 이 허리케인이 오바마에게 커다란 행운이 됐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번 허리케인은 근거없는 행운이라기보단 '당연한' 행운이다. 미국에 얼마나 허리케인이 자주 들이닥치는가. 거의 매년 우리는 미국을 덮치는 재난과 구호의 현장을 엿볼 수 있다. 재난관리 공공 시스템을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는 롬니와 공화당류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물론, 선거 일주일여 전에, 그것도 미국의 중심부에 샌디가 도착했다는 건 '정치적' 행운임이 틀림없다.
사실 지난 여름 우리나라에 태풍 볼라벤이 한창 그 위용을 떨치고 인명 · 재산피해를 내고 있을 때 몇몇 자료를 찾아놓은 게 있다. 난 알베르 까뮈의 충실한 팬이고 소설 <페스트>의 성실한 독자이므로, 머릿속으로 이런 가설을 하나 세워보았던 적이 있다. '커다란 물리적 재난은 사회 전체의 공동체적 · 협력적 태도를 고양시키며, 이는 개인의 정신적 고립을 대표하는 병리현상인 자살의 수를 감소시킬 것이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이 가설은 틀렸다. 간단하게 당시의 자료들을 여기 옮겨본다.
올해 여름 미국은 50년 만에 최악의 가뭄에 시달렸다. 호주 연구진은 1920년부터 2007년까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州)의 강수 기록을 토대로 가뭄과 자살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사, 그 결과를 8월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30~49세의 농촌 지역 남성을 대상으로 했을 때 가뭄이 지속되면 자살의 상대적 위험성이 1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작 실패로 인한 재정적 스트레스에다 계속되는 가뭄이 가져오는 환경 여건 악화 등이 겹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농촌 여성의 자살은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재난 시기의 직접적인 자살과는 조금 맥락이 다르지만, 재난의 장기적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2008년 8만 8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국 쓰촨대지진의 경우, 1주년을 맞은 당시에 자살자가 급증해 사회문제가 된 바 있다. 우리의 경우도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생존자 중 절반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2007년 태안사고 이후 지역주민 60%가 PTSD에 시달렸다는 자료도 있다. 두 사고 후 피해 당사자나 사망자 가족 등이 자살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두 사례의 경우 자연 재난은 아니지만, 한 개인과 사회의 일상적 삶과 네트워크가 급격히 무너지면 그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연의 힘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지는 게 인간이다. 까뮈가 묘사한 바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명백한 위협은 개개인의 단절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재난을 당한 당사자의 삶의 아픔과 좌절까지 위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재난은 언제나 '국지적'이어서, 모든 국민이나, 모든 세계인이 다 함께 절망적인 아픔에 시달리는 상황을 상상하긴 힘들다.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설명은 이미 100여 년 전에 등장했다. 그러니 조금 '덜 아픈' 사회의 다른 부분이, 재난으로 인한 절망적 아픔을 힘껏 나눠야 한다는 시스템의 당위성과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물론, 그런 공공시스템의 끊임없는 쇄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에는 '눈 먼 돈'이 들어가므로 일단 축소하고 보자는 의견보다 더 위험한 게 또 있으랴. 샌디로 인해 희생된 고인과 유가족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허리케인 샌디는 '정치적'으로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독이니 기도니 하는 것을 초월해서, 우리를 결합시켜주고 있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을 하고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페스트>의 한 대목이다.
'책 만드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투명한 어릿광대를 보라 (0) | 2012.12.16 |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0) | 2012.11.16 |
불영사 ‘선식일치’(禪食一致) 정신, 책으로 나오다 (2011) (0) | 2012.09.08 |
간화선에 있어서 의정(疑情)의 전환: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증언 (0) | 2012.09.08 |
수행과 깨달음의 개별성과 보편성: 한국 근대 불교의 간화선을 중심으로 (0) | 2012.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