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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남자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오직 홀로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여자.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었다. 모든 인간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언제고 벌어지는 도덕적 참상의 알레고리. 



오로지 한 사람만이 눈멀지 않았고, 그 이유는 작품에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왜? 모든 사람의 눈이 멀어도, 우연히도 어느 누군가는 눈뜰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그러나 그런 우연적인 눈뜸만이 인류를 구할 수 있을 것이기에. 



오직 자신만이 눈떴던 사람, 모든 사람의 눈이 뜨이자 돌연 실명하다. 왜? 눈이 보이고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작품의 주제의식. 



모든 사람은 필연코 삶과 도덕의 가치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게 인생이다. 모든 삶의 아픔은 다만 시간차일 뿐이며, 비켜갈 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 모두는 이 눈먼 세계와 대결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아무 이유없이. 



더불어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도시는 법과 제도와 조직과 문명의 상징. 옳고 그름은 오직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도덕과 신앙과 선(善)의 힘이 아니라, 타인과의 협력과 신뢰, 구체적인 정치의 힘에 기대를 건다. 타인을 보고, 타인을 믿고, 타인과 한 배를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일 게다.  



소설의 절정, 성당 안의 눈먼 성상(聖像)들을 묘사한 장면은 장엄했다. "자신을 조직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눈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란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지금도 그녀는 남편의 침대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이 작은 목소리로 남편과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이 교육받은 사람들이란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늘 서로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다른 부부들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사라진 후, 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다. 아마 현재의 불행이 과거의 사랑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19)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요. 정말 나쁜 것은 우리를 보호한답시고 여기 와 있는 저 군인들의 행동이에요, 하지만 그들조차 모든 핑계 가운데도 가장 그럴듯한 핑계를 갖다댈 수 있어요, 즉 두려움을 핑계로 내세울 수 있다는 거죠. (139)



눈 먼 두 사람이 싸우는 꼴이 어떤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 싸움이란 건 언제나 실명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190)



존엄성이란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인생이 모든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238)



남자가 혼자 침대에 몸을 뻗고 누워 불가능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여자가 살며시 이불을 들어올리고 미끄러져 들어와 천천히 몸에 몸을 비비고, 이어 가만히 누워 그들의 피의 온기로 놀란 살갗의 갑작스러운 전율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그것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가 원해서 그럴 때. (243)



네년은 눈이 멀지 않았구나, 날 속일 수는 없어. / 어쩌면 내가 이 가운데 가장 눈먼 사람인지도 모르지, 난 이미 살인을 했고, 필요하다면 또 할 테니까. (269)



여자들은 번갈아가며 다시 태어나요, 점잖은 여자는 창녀로 다시 태어나고, 창녀는 점잖은 여자로 다시 태어나죠. (286)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인내심을 가져라. 시간이 제 갈 길을 다 가도록 해주어라. 운명은 많은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는가. 여기에 이 지도를 세우기 위해, 그리하여 이 여자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도록 해주기 위해, 운명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는지는 운명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 (330)



아가씨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는 둘 다 눈도 멀고 감정도 멀었을 거야,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우리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그 얘기야. (354)



이제는 선과 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평등해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는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387)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395)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서, 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서해줄 구실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 차례가 될 때를 대비해 미리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해놓듯이 말이에요. (405)



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오,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가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들이었다. 의사의 아내는 작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작가는 두 손으로 그 손을 잡더니 천천히 자기 입술 위로 들어올렸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이것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414)



죽음이란 조직 해체의 결과일 뿐이야. / 눈 먼 사람들의 사회가 어떻게 조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 스스로를 조직해야지, 자신을 조직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눈을 갖기 시작하는 거야. (416)



어떤 면에서는 나도 눈이 멀었지, 당신들의 먼 눈이 내 눈도 멀게 한 거야. (…) /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419)



먼 사람 둘이면 하나보다는 잘 볼 수 있을 거예요. (…) 나는 아저씨와 함께 있고 싶어할 만큼 아저씨를 사랑해요, 그리고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본 것은 처음이에요. (432)



사제가 성상들의 눈을 가린 거라면 좋겠군.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에요. 그게 말이 되는 유일한 가설이야, 그게 우리의 수난에 어떤 위엄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지. (…) 그 사제는 모든 시대와 모든 종교에서 최악의 신성 모독을 저지른 사람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그 신성 모독은 가장 공명 정대하고 또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것이기도 해, 그 사람은 궁극적으로 신은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러 여기에 온 거야. (448)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461)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