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과 여성은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또 멀다. 많이 다르지만, 들여다보면 많이 같다.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쓴 내밀한 기록들을 남성이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세상과 맞서 스스로에게 솔직하려는 그들의 외롭고 진지한 인간성의 결은, 성의 구분을 떠나서, 읽는 이에게 감동과 용기를 준다. 좋은 글이란 결국 그러한 '결'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책 속에 씌어있는 글과는 다르다. 만약 삶과 현실이 종이 위에 정제되어 있는 작품처럼 '육체화'되지 않은 것이었다면, 인간세상에 천국은 이미 수백번 거듭되었을 것이다. 인간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글로써 이룩되는 천국이 될 필요도 없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깊은 자각을 뿌리삼아, 혼탁한 일상을 견디고 자신과 쉼없이 대면하며 고통받으면서,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냄'으로써 어쩌면 사람은 스스로를 쇄신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글의 '결'이란, 오랜 시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그려낸, 글쓴이의 진정성 있는 삶의 '풍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언니네 방2 :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울 때 내게 힘이 되어줄 그곳>의 많은 수기들은 그런 면에서 내게 감동적이었다. 요컨대 책 속의 여성들은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이렇게 살아도 참 살만하더라. 그러니 다른 여성들이여, 용기를 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자신의 상처와 약한 모습을 치장하거나 과시하지 않고, 값진 풍속의 힘으로써 극복의 힘을 보여준 것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었다. 나(거기다가 남성인)는 읽을 뿐이지만, 그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 더 불리한(혹은 치명적인) 게임을 오랫동안 해온 게 사실"('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싶은 여자들에게' 중)인 사회에서, 시시각각 세상과 그리고 스스로와 싸우면서, 고독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지닌 단독자로.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누구도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다. 솔직하고 당당하고 싶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거짓과 기만과 비굴과 비겁함이 넘쳐난다. 여성의 경우엔 어떨까? 지나친 일반화일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여성들 중 그 누구도 남성과 남성중심사회에 종속된 채 살고 싶어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접하는 일상 속에서도, 많은 경우 여성들은 남자들과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 채 지나치게 '여성적인' 모습을 보이기가 일쑤다. 그리고 정확하게도, "여성이 싸우지 못하는 것은 마음 속 싸움에서 이미 졌기 때문이다."('싸울 줄 모르는 여자들에게' 중) 여성주의고 남녀평등이고 뭐고 간에, 일단 겁이 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을 비하하거나 여성에게 지나친 '책임'을 부과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서의 나 역시 사회적 · 인간적으로 대개 비겁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권위와 복종에 관한 사회심리학적인 연구결과들은 집단에 동조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를 알려준다. '내집단'을 향한 인간의 그 강력한 열망, 세상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은 심리적인 본능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밀그램이란 학자는, 집단 속에서 외톨이가 된 자신을 지지해주는 파트너 한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개인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느냐 아니면 집단에 흡수되느냐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고 전해준다. 좀더 독립적으로 살려는 여성들에게 이 책이 그 '한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해주리라 확신한다. 여성들 모두가 테스와 같은 비극적인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테스의 남편에게 편지를 쓴 친구들의 정성어린 연대의식에서 보듯, 현실 속에서도 이 책의 글쓴이들과 같은 이들은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의 상처를 들어주면서 보듬는 일은, 정말이지 남성들에게 훨씬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잘 씌어진 글은 감동적이지만, 우리는 결국 진짜 용기있게 살아가는 사람과 그의 삶의 빛깔을 통해서만이 진정으로 감화받고 거듭날 수 있다. 삶 속에서 그러한 사람이 '나의 편'이 되어준다면, 또는 우리가 어느 외로운 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언니네 방2>의 여성들도 앞으로 자신들이 쓴 글에 얽매이지 않은 채, 더욱 독창적이고 새로운, '여성으로서의' 삶의 풍속을 완성해가길 바란다. 나도 '남성으로서의‘―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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