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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남자

카를 융 자서전: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이 돌에 새긴 인용구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카를 융 자서전을 마침내 다 읽었다. 방황과 주저와 좌절과 자학의 한가운데에서, 25년 동안 젖고 또 젖어버린, 무겁고 습한 영혼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대만족이었다.



칼 융의 사상과 학문적 업적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읽기에는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힘든 부분도 있었고,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분히 자신의 '세계'를 냉철하게 펼쳐보이는 데에 역점을 둔 융의 자전적 진술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정신분석의의 자서전을 읽은 것도 처음이었고, 거기다가 융은 실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정신분석학자인데 그가 자신의 수십 년 전 꿈들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사실 좀 질려버리기도 하였다. 방금 기연이한테 융의 사상에 관해 언급하며 격려하는 쪽지를 보냈는데…. 그녀는 정말 건강한 무의식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솔직하게 해주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융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는 퍽 자세하고 길게 이어지는데, 두세살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기억에선 그만 입이 벌어져버렸다. 일찍이 자신만의 고독한 영역을 형성해나갔던 융. 그는 명석하고 확실히 어른스러운 정신세계를 일찍이 갖추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열 두살의 속임수와 신경증에 관한 언급은 내게 인상적이었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명확하게 알고 그것을 실행하기란, 소위 '어른'이 되었다는 사람들도 얼마나 힘든 것이더냐. 



융이 자기 자신과 어머니에 관해 언급하면서 '제1의인격'과 '제2의인격'에 대해 구분한 것도 흥미로웠다. 물론 융의 설명은 단순한 선에서 그쳐서 두루뭉술하긴 했지만, 어쨌든 "제2의 인격"(자연의 마음. 인간 본성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본성 고유의 지혜를 의미하며 사물을 거침없이 말하는 특징이 있다. 고태적이며 관조적이고 통찰적이다.)에 대한 그의 언급은 자서전의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서 등장한다. '제2의인격'은 융이 평생을 통해 관심을 기울였던 '신적인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근대적 개인성에 대한 부정, 연속성과 관계성에 대한 주목은 융 사상의 특징으로 보인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은 개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은 개인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진정한 개인이 탄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불확실감이 생겨난다."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말보다는 주위 분위기의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것들에 대해 훨씬 더 잘 반응한다. 어린아이는 그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한다. 즉, 어린아이 마음 가운데 보상적인 성격의 상호작용이 생겨나는 것"이라는 융의 진술에 전적으로 공감하였고….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칼 융의 '진짜' 삶의 결이 어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진리를 설파하는 지성인의 실제 현실에서의 '삶' 또한 그가 펼치는 '사상' 못지 않게 진리를 위해 중요하다는 뉘앙스의 언급도 자주 나오는데, 이는 내게 귀중한 보물 같은 생각이었다. 나 또한 이런 류의 생각을 줄곧 해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융의 니체에 관한 비평에서도 그렇고….



"무의식 내용은 나를 정상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과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 사실들이란, 내가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고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며, 내게는 처와 다섯 아이가 있고 퀴스나흐트 제슈트라세 228번지에 살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니체처럼 괴기한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가 아님을 날마다 증명해주었다.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방황하고 침체되어 있던 때이긴 했지만,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였다.
그러므로 나의 가족과 직업은 다행스럽게도 늘 현실감을 잃지 않게 했으며, 내가 정상인으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었다."



젊은 시절 만났던 '영매'에 관한 융의 생각과, 융이 가지고 있는 우연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요소(심령심리학)들에 대한 관심은 매우 흥미로웠다. 사실 중간중간에 '이건 뻥을 치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 갖다붙이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융을 떠나서 어쨌든 현대과학이 증명하지 못한, 그러나 분명히 현존한다는 갖가지의 '초인적'인 현상들! 



정신분석의로서 융.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단지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인류의 오랜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우둔하고 감정없이 멍청하게 행동하는 듯한 환자들의 마음 속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일, 훨씬 의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프로이트와의 결별로부터 시작되는, 아니마, 연금술, 카르마, 그리고 종교와 사후세계 등등 융의 학문적인 발전은 앞으로 융을 깊이 공부하며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과 같은 융의 언급(그리고 "모든 성급함은 마귀로부터 나온다")은, "오래된 미래"라고 통칭될 수 있는 인류의 숙제와도 연결시켜 생각해 볼 만하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에 제약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다시 말해 무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조상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근원적인 즐거움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뒤집어놓고 있는지, 혐오감으로 외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어둠속에 남게 된다. 우리의 내적인 평안과 만족은, 개체를 통하여 인격화된 역사적 가족이 우리 현재의 덧없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거의 대부분 좌우된다."



융의 여행에서도, '낯선 것은 실은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다시 말해 인류가 간직한 전체적 인간성을 깨닫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서양문명의 '한계'를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어쨌든 "신화의 힘은 과학보다 강하다"는 것이고, 참으로 공감되는 융의 지혜였다. 푸에블로 인디언 추장과의 대화에서 융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도중 방문한 가정의 한 여성을 보고 융이 느낀 생각도 흥미롭다. 한 인간(융은 여기서 여성을 강조하였는데)의 '전체성'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내적 평온과 평화로운 에너지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세상에 어떤 손에 잡히지 않는 이념과 주의들이 난무하든간에, 도대체 이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나는 세련된 말과 글을 믿지 않는다. 이것들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으며, 그러므로 덧없을 것이다. 모든 덧없지 않은 것은 오로지 '순간' 속에 있다. 그 순간은 바로 전체성과 함께 하는 평화로운 순간일 것이다. ("감정연습")


"나는 그녀의 행동거지에서 우러나는 확신과 자부심이 거의 대부분 그녀의 분명한 전체성과의 동일시에 근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전체성은 아이, 집, 작은 가축, 샴바,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나머지 요소인 그녀의 매력적인 몸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암시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그는 잠깐 있다가 없다가 하는 존재 같았다. 현재 그는 미지의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 여주인은 공공연히 아무 문제 없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자, 즉 남편의 진정한 '임시 처소'였다. 문제는 그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전체성 속에 존재하면서 짐승떼와 함께 돌아다니는 남편의 '자기장'의 중심이 되고 있느냐 하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이 '소박한' 여인의 정신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의식적이므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나는 백인여성의 남성화가 그녀들의 천연적인 전체성(샴바, 아이, 작은 가축, 자기 집, 그리고 부엌의 불)의 상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여성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리고 백인 남성의 여성화는 여성의 남성화에서 야기된 후속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았다. 가장 합리적이라는 국가들이 성의 차이를 가장 많이 소멸시키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이다."



정말 다시금 책을 들어 읽다보니, 융의 사상의 폭과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여든 둘의 고령의 나이에…. 융의 좌우명대로 운명과 도전에 맞서 싸운다면, 그리하여 자신의 신경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이렇게 후학이 고개를 숙일 만한 대가다운 사상을 내놓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의 융 공부가 기대된다.